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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03일
2004년 12월 12일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자 말자 가이드북의 지도를 보고 마하보디 사원을 찾아 나섰다. 제법 번화한 시골장터 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사람 그림자라고는 내 것 밖에 없는 몰락한 사원. 아 붓다의 깨달음 후 강물 같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원이 이렇게까지 몰락했나 하는 생각과,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몇 달 간의 인도여행 동안 이젠 건축물의 양식을 보면 그 건축물이 어느 종교에 속한 것이라는 것 정도는 구별해 낼 수 있는 눈썰미는 생겼기 때문이다.
사원은 전형적인 이슬람양식이다. 붓다와 이슬람? 둘의 언밸런스한 이미지의 결합이 머릿속 에서 횡 하니 지나갔다. 잘못 찾아왔군. 다시 지도를 보며 이슬람 사원을 나와 마하보디 사원을 찾아 나섰다. 거지, 시멘트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일렬로 앉아 있는 거지 떼들을 보며 그 시멘트 담벼락 뒤가 마하보디 사원이라는 걸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거지들은 여행객이 몰리는 곳에 있게 마련이니까. 이 또한 인도에서 배운 것이다. 각자의 동냥깡통을 앞에 놓고 무표정하게 있는 거지들을 찍고 싶었다. 거지들의 앞으로 지나가는 '외국인 고객'들이 없어 거지들의 표정은 평상(平常) 그대로이다. 비스듬히 몸통에 비껴 맨 몸통가방에 손을 넣어 카메라의 렌즈덮개를 열고 셔터위에 손가락을 올려놓는다. 그리곤 서부영화의 속사총잡이 처럼 카메라를 재빨리 꺼내며 '찰칵찰칵찰칵'. 카메라는 매뉴얼의 설명처럼 0.2초의 간격으로 플래쉬를 터트렸다. 불의의 일격을 당해 잠시 어안이 벙벙한 거지들은 정신을 수습하자 깡통을 두드리며 모델료를 달라는 항의의 시위를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카메라의 렌즈덮개를 닫고 카메라를 몸통가방에 다시 넣고 있었다. 진을 친 거지들의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서 길고 넓은 길을 따라 가니 마하보디 템플의 입구가 눈앞에 드러났다. 2루피를 내고 신발을 보관하고 맨발로 마하보디 템플의 경내에 들어섰다. 경내에 깔아놓은 벽돌은 태양에 잔뜩 달구어져 발바닥을 익힐 만큼 뜨겁다. 저녁에 캘커타를 떠난 열차가 가야에 도착한 것은 새벽, 가야에 내린 외국인 여행객은 나와 열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호주아가씨 샐리 뿐이다. 기차역의 리타이어링 룸에서 세수를 하고 홍차와 커피를 각각 한잔씩 마시고 힌투스탄 타임스를 대충 훑어보고 나니 바깥이 훤해진다. 집을 떠난 지 두 달 반, 캘커타를 반환점으로 이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여행이다. 해뜨기를 기다렸다가 오토릭샤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3인승 승합차)를 한 대 빌려 부다가야에 들어가기로 이미 열차 안에서 샐리와 합의했다. 가야에서 부다가야로 들어가는 4km의 길은 어둠이 내린 후면 강도들이 날뛰는 험악한 길이라고 가이드북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오빠가 호주의 교포아가씨와 사귀고 있기에 한국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백인 아가씨에게 물었다. 부다가야에 얼마나 있을 거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정, 넌 어때? 난 최소한 하루 이상은 있을 거야, 샐리. 사실 부다가야에서 몇일을 보내고 싶었다. 깨달음을 얻은 싯달타가 부처로 다시 태어난 그 보리수 나무아래서 몇일이고 앉아 있으리라, 여행을 떠나기전 가이드북을 보면서 엉성한 여행계획을 마음속에 그릴 때는 그렇게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갠지즈 강변의 도시 바라나시와 계획도 없이 충동적으로 찾아간 네팔에서 너무 오랫동안 밍기적 거리는 바람에 반환점인 캘커타 이후부터는 돌아가는 발걸음이 급했다. 게다가 아직 가야할 곳은 많고 노잣돈은 서서히 줄어가고 무료항공권의 유효기간도 한달 여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정. 내가 받은 것은 겨우 3주의 휴가뿐이니까. 너 처럼 몇 달을 여행하는 것과 달라. 부다가야에 도착해서 오늘 다시 나올 건지 몇 일을 보낼지 결정해야겠어. 샐리의 말을 듣자 대답이 금방 혀 끝에 머문다. 나도 너처럼 3주의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면 ,회사를 관두지 않았을지도 몰라 샐리. 그러나 입을 다물고 만다. 샐리와 나는 기차역을 나와 우리를 벌떼 처럼 둘러싸는 릭샤왈라 (오토릭샤 운전기사)중 한명을 골라 흥정을 했다. 우리를 태운 오토릭샤는 헬리콥터같은 엔진소리와 매연을 내뿜으며 부다가야를 향해 달렸다. 부다가야로 가는 길이다. 나란자나 강을 따라 부다가야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 왼편에는 강, 오른편에는 집들과 푸른 논들사이에 듬성듬성 서 있는 키큰 나무들. 길은 황토빛이다. 이 아름다운 길이 해가 지면 목숨을 걸고 달려야 하는 길로 변한다. 길의 양면성, 모든 길엔 양면성이 존재한다. 여름아침의 풍경은 너무 상쾌해 좁은 오토릭샤의 창밖으로 내다 보기엔 아깝다. 나는 달리는 릭샤의 뒤에 수상 스키를 탄 것처럼 매어 달렸다. 릭샤왈라와 샐리는 계속 들어오라고 했지만. 세 번째군, 릭샤 뒤에 매어달린 채 담배를 피워 물며 뇌까린다. 흔히 불교의 사성지라고 말하는 부처의 태어난 곳, 깨달음을 얻은 곳, 처음 설법을 한 곳, 열반에 이른 곳, 네 곳 중 세 번째로 부다가야를 가는 길이다. 이미 땀을 비처럼 쏟으며 초전법륜을 설법한곳인 사르나트와 열반에 이른 곳인 쿠시나가르엔 다녀왔다.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에는 가볼 생각이 없다. 나는 탄생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설화에 의하면 싯달타의 탄생도 이미 연등불에 의해 예견 혹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또는 그렇지 않다면 인간 붓다 조차도 자신의 실존의 근원에 대하여 결국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 거나 다자이 오사무 처럼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할수 밖에 더 있겠는가. 가보고 싶은 곳은 자의 아니게 태어난 인간 싯달타의 흔적이 남겨진 곳들뿐. 그래서 세 번째인 부다가야는 내게 붓다의 사성지중 마지막 방문지이기도 하다. 길에 나와있는 소들과 노는 아이들을 아슬아슬 하게 피하며 릭샤는 부다가야에 도착했다. 배낭을 매며 샐리에게 물었다. 난 여기에서 오늘은 머물래 그 이상은 모르 겠구. 넌 어쩔래 샐리? 아마 난 오후에 다시 가야에 나가 아그라로 갈 것 같애. 그래 그럼. 안녕 조심해. 너도. 샐리와 난 각자의 배낭을 매고 헤어졌다. 길 위에서의 짧은 만남이다. 뜨거운 벽돌을 밟으며 마하보디 사원의 경내를 둘러본다. 경내는 이런 저런 건축물들로 인해 꽤 넓다. 싯달타가 6~7년에 걸친 수행으로 상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당시는 그냥 강을 끼고 있는 숲이었으리라. 경내를 한바퀴 돌아 본 후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 앉았다. 여기 저기서 진홍빛의 승복을 입은 티벳승려들이 오체투지로 몸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절은 글자 그대로 오체투지, 절이라기보다는 슬라이딩에 가깝다. 오체투지를 보며 드는 느낌은 종교적 경외감 보다는, 어떻게 저렇게 앞으로 잘 미끄러 질 수 있을까 하는 천박한 호기심이 먼저다. 천박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까치발을 하고 다가가 나무 뒤에서 훔쳐본 그들이 오체투지를 할 때 바닥에 깔개로 쓰는 나무판은 얼마나 많이 몸을 던졌던지 닳아 윤기가 날 정도다. 윤기가 나는 나무판 위에는 손수건 크기의 세장의 헝겊이 놓여 있다. 승려들은 정확히 헝겊에 양손과 무릎을 대고 슬라이딩 한다. 오체투지를 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나에게 등진 체 앉아 있던 티벳 노승이 일어섰다. 그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노승은 온화한 눈인사와 더불어 합장을 했다. 마치 어릴때 공중목욕탕 여탕을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며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며 합장으로 인사를 받았다. 노승은 가고 나는 두리번 거리며 노승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본다. 별 다른 느낌이 없다. 이제 보리수 그늘 아래 앉아 보자.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마지막 결사정진을 했던 싯달타의 머리위에 그늘을 드리워줬던 그 보리수 그늘 아래. 보리수 아래 싯달타가 앉았던 금강좌가 있다. 금강좌의 둘레로 금빛 철책이 둘러쳐져 있고 금빛 철책의 주위로 다시 석책이 둘러 쌓여 있다. 석책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보리수는 바로 눈앞이다. 승려들과 대만에서 온듯한 불교신도들이 끊임없이 보리수를 돌며 절을 했다. 그러나 나는 나른한 더위와 식곤증과 간밤의 기차에서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졸렸다. 붓다처럼 큰 깨달음을 얻을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걸 스스로 알기에 가부좌는 관두고 보리수 그늘 아래서 와선하며 단꿈을 꾸고 싶지만 성스러운 분위기는 도저히 범인의 낮잠을 허용할 것 같지 않았다. 붓다 흉내를 내어 본답시고 결가부좌를 하고 반개한 눈에 두손은 단전에 올려놓고 호흡을 골라보지만 머리속에 드는 것은 잡념뿐. 금빛철책에는 '보리수 잎을 절대 따지 마시오. 그 후 사태에 대해선 책임지지 못합니다' 라는 위협적인 글귀가 영어로 적혀있다. 깨달음은 못 얻을판이니 잎이라도 따가자 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 만은 아니구나, 뒤집어 생각하면 범인은 나만은 아니구나 라는 씁쓸한 위안이 입가를 맴돈다. 주위를 둘러보니 보리수는 특별한 나무는 아니다. 마하보디 사원의 여기저기에 보리수와 똑같은 수종의 나무는 흔하다. 보리수는 그저 인간 싯달타가 햇볕을 피하기 좋아 그 그늘아래 앉았던, 이 지방에서 흔하디 흔한, 잎이 넓은 활엽수의 나무일 뿐이군. 싯달타가 앉음으로 해서 똑같은 수종의 나무이지만 보리수라는 이름의 한 그루의 고유명사화 된 나무와 이름모를 나머지의 나무들로 나뉘어 졌을뿐 이다. 문득 머리속에는 엉뚱한 사업구상이 떠오른다. 똑같은 수종이니 저 옆의 나뭇잎을 기백장 따서 한국에 돌아가 이게 그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의 잎이야 라고 사기를 쳐서 한 장에 천원씩 팔면 어떨까. 아이템과 시장 둘다 매혹적인 조건이다. 공급은 공짜고 시장의 크기는 대한민국 불교신자 천만의 숫자와 맞먹는다. 적어도 다음 여행의 비행기표 가격 정도는 건질수 있는 비즈니스다. 사실 싯달타가 어느 나무에 앉았는지는 누가 알겠는가? 지금 우리가 이 나무아래에 앉았다고 믿을뿐. 우리가 현재 믿는 보리수의 정통성도 불완전하다. 문헌에 의하면 '현재의 보리수는 1870년대에 심어진 것으로, 당시 썩어가는 원목에서 채취된 씨를 통하여 대가 이어진' 것이다. 스리랑카에도 보리수는 있다. 아쇼카왕이 스리랑카에 불교전파를 위해 승려를 보냈을 때 이곳의 보리수의 묘목을 취하여 보냈다고 한다. 어릴 때 들었던 얘기는 붓다의 위대성은 왕자라는 부귀영화가 보장된 출신성분을 박차고 아무것도 없이 구도의 길을 간 붓다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논조가 대부분이었다. 보리수 아래서 나는 그 논조가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싯달타는 적어도 자신이 구도의 길을 가기위해 버린 가족들의 밥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나의 입장에선 그렇다. 아직 누리진 못해봤지만, 부귀영화를 두고 혼자 떠나는게 당장 내일의 밥을 걱정해야만 하는 노모와 처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것 보다는 쉬울 것 같다. 아무 조건 없이 이 한몸 이야 어떻게 되든 혼자 떠난다면 말이다. 보리수 나무아래 앉아 있으면 앉아 있을수록 점점 선명하게 보이는 건 나의 카르마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들 뿐이다. 잎사귀 하나가 떨어졌고 잎사귀가 떨어지는 걸 기다렸다는 듯 대만관광객들이 잽싸게 잎사귀를 주웠다. 더 이상 머리 아픈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보리수를 바라보며 잎사귀가 또 떨어지기 만을 기다렸다. 깨달음 대신 잎사귀라도 주워 갈려구. 그러나 잎사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배가 고팠다. 새벽에 기차역에서 짜이와 과일로 끼니를 때운 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주린 배를 채워야겠다고 나온 사원의 앞에는 노점상들이 제법 늘어서 있다. 그들이 파는 물건들의 종류는 아이러니 하다. 염주나 부처의 상 같은 불교용품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조잡한 인쇄의 포르노 서적들, 메이드 인 저머니라고 하지만 역시 조잡한 프린팅의 라벨 때문에 메이드 인 인디아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다양한 종류의 최음제들. 하긴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결국 붓다의 깨달음과 깨달음을 처음 설법한 초전법륜이라는 것도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 로와 질수 없고 그렇기에 괴로움과 집착이 생긴다는 것 아닐까. 붓다 당시에도 늙어 쇠잔한 육체의 붓다에게 수잣타가 우유죽을 공양하자 붓다를 따르던 제자들이 붓다를 수행을 포기한 수도자로 간주하고 떠나 버렸으니까. 어쨌든 붓다는 그것을 멸하고 도에 이르렀지만 붓다의 후손들은 먹고 살아야 한다. 이것 또한 아이러니다. 거지든 노점상이든 그들은 괴로움과 집착에 머무르지만 깨달음을 얻은 붓다 때문에 먹고 살수 있으니. 나는 무엇에 쓸지는 모르지만 최음제인 스패니쉬 플라이와 버튼을 누르면 철컥 소리를 내며 예리한 날이 튀어나오는 재크 나이프를 샀다. 부다가야의 한국절 고려사에서 만난 한국청년과 비구니스님과 티벳 식당에서 티벳식 수제비로 저녁을 먹은 후 다시 마하보디 템플을 찾았다. 스님은 정식승복으로 갈아입고 보리수 주변을 몇바퀴 돈 뒤 결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방해를 하지 말아야 할것같아 나와 청년은 보리수 앞에서 중국인들의 예불을 구경했다. 삼십여명의 신도들이 탑돌이를 마친후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바닥에 앉아 경을 외우는 소리가 사원에 메아리처럼 퍼져갔다. 나는 깨달음을 얻었던 붓다가 무아지경에서 거니는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 하여 바닥에 깔려 있는 연꽃모양의 돌들 'Ratanacankma Chaitya'를 일일이 하나씩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세운 '마하보디 레스트 하우스'에서 두달여 머물며 동안거를 보낼 작정이라고 했다. 백두산에서 중국을 거쳐 티벳 에 들어가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 인도로 들어온 청년은 부다가야가 마음에 든다며 몇일 더 머무르고 싶다고 했다. 깨달음의 장소답게 부다가야엔 불교국에서 세운 저렴한 숙소와 사찰들 그리고 명상센터가 많다. 그러나 나는 내일 부다가야를 떠날 것이다. 나는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는 카르마와 욕망이 무겁고 무섭다. 부다가야는 자신의 밑바닥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곳이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옆방의 일본인 커플의 높은 언성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높은 언성의 말다툼 소리가 차츰 기묘한 느낌의 신음소리로 변해갈 때 방에서 나와 식당이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부다베가스'의 인도소년 종업원들은 자다가 일어났는지 주방옆 방에서 눈을 비비며 나왔다. 맥주를 주문하고 여행객들이 두고 간 철 지난 시사주간지를 읽는 동안 소년은 의자에 기대에 꾸벅꾸벅 졸았다. 괜찮냐고 물었더니 소년은 괜찮다고 하면서 연신 눈을 비볐다. 세 번째 괜찮냐고 물었을 때 세 번째 소년이 괜찮 다고 대답하자 맥주를 더 마시고 싶었지만 방으로 내려왔다. 일본인 커플의 방은 태풍이 지나간 듯 고요하다. 취해서 혼자 잠드는 부다가야의 밤이다. 신라면으로 아침식사 겸 해장을 하고 나란자나 강으로 간다. 배낭은 이미 잠들기 전에 챙겨놓았으니 몸통가방 하나만 매고 나란자나 강에만 갔다가 숙소로 돌아와 부다가야를 떠나면 되는 것이다. 겨울이 가까워져서 여름이면 강물이 어른의 목까지 찬다는 나란자나 강의 수량은 발목에서 무릎정도 밖에 오지 않을만큼 현저히 줄어 있었다. 소년시절 자율학습 시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온몸이 떨렸던 헤르만 헷세의 싯달타의 기억남는 대사가 있다. '고오빈다여 강으로 가자.' 뱃사공이 된 싯탈타를, 떠난 고오빈다가 쇠잔한 몸을 이끌고 우연히 싯달타를 만났을때 다. 오랜 세월을 수행에 지쳐 돌아온 고오빈다는 강을 떠나지 않으며 강물과 같은 깨달았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한, 깨달은자 싯달타를 발견했다.오래 전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옛날 붓다가 건넜던 것처럼 걸어서 강을 건너 본다. 강을 건너가 민가에서 짜이를 한잔 마시며 바라본 마하보디 사원의 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카메라를 꺼내 맨발의 아이들과 치마를 걷고 강을 건너오는 인도여인들의 스냅을 몇장 담았다.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메고 체크아웃을 하자 여행객들이 하늘 이라 이름 붙여준 종업원 인도소년이 섭섭함을 표시했다. 유일한 한국여행자인 내가 하루밖에 머물지 않아서 그런 눈치다. 나는 소년에게 마지막 남은 볼펜 한 자루를 건넸다. 소년의 표정은 금새 밝아졌다. 아마 소년의 비밀창고엔 수십 자루의 한국볼펜이 있으리라. 소년이 가르쳐 준 데로 가야로 나가는 템포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6인승 승합차) 정류장으로 갔을 때 6인승인 템포엔 이미 여덟 명이 들어 차 있다. 이미 여러번 지붕 신세를 졌기에 별 망설임 없이 템포의 지붕에 올라 배낭을 깔고 앉았다. 템포가 가야로 달릴 때 부다가야의 지평선위로 해가 진다. 갑자기 부다가야에 머무는 동안 우울했던 기분이 좋아져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불렀다. 우울함과 쾌활함의 경계에서 가끔 혼자 보른 노래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난데 없는 하모니카 소리에 템포 안에 들어차 있던 인도인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빼어 날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음 그럼 청중들의 호응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인도노래나. 이 무렵 인도 최고의 힛트곡은 바라데시 다. 나는 뽕짝연주법으로 바라데시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라데시 바라데시 자나네히/ 무제초르케 무제초르케 / 오 그대여 가지마세요/ 만일 그대가 간다면/ 템포안의 승객들의 코러스가 지붕위의 내게 들렸다. 기차역앞 호텔 식당에서 탈리 (인도정식)를 먹고, 미네랄 워터 한병을 다 마시고 ,차이 두잔, 바나나 세 개를 해치우고, 릭샤왈라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릭샤왈라들끼리 붙은 싸움판을 구경하다 보니 기차가 도착했다. 나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로 갔다. 고통스러웠던 많은 삶들을 통해 밝히고자 갈망해왔건만 밝힐수 없었던 너, 집짓는 자 이제 네 정체, 내게 밝혀져 나 한점의 집착이 없는 위 없는 깨달음에 있다. 집 짓던 자여, 너를 지탱하던 서까래는 부수어졌고 너를 세워주던 대들보도 부수어졌으니 너 이제 다시는 집 지을수 없다. -법구경, 영문판 법구경에서 정무진 의역 2004년 12월 12일
1. 네이버 블로그가 싫은 이유
- 블로그가 아니다. 싸이월드의 큰 화면 판일 뿐. 게다가 더 상업적이다. - 색깔이 없다 자신의 생각은 없고 모두 퍼온 것들 뿐 - 어지럽다 현란한 이미지로 도배. 색즉시공 이거늘 - 천편일률적이다 모두 비슷비슷하다 2. 이글루 가 좋은 이유 - 대체로 위의 네이버 블로그가 안 좋은 점의 반대 의 장점들 - 무엇보다 이글루 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이글루는 그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웬만하면 귀찮아서 이사라는 거 안할려고 하는 데... 이글루에서 블로깅을 이어가겠습니다. 내일 출발하는 3개월 가량의 여행기도 이글루에 연재하겠습니다. lastrada.egloos.com 아, 네이버 블로그의 장점! 스크랩북으로 쓰기 좋다, 를 잊었군요. 네이버 블로그는 기사 스크랩북으로 사용됩니다. 2004년 12월 12일
PROLUGUE. 1983년의 동해남부선
그러니까 1983년의 어느 날, 늦봄의 일요일 아침, 부산 동래역에서 나는 급우 두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녀석은 오지 않았고, 기차의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몇달이 지나지 않았던 때, 쉬는 시간에였나 돌아오는 일요일에 바다낚시를 가자 라고 소년 셋의 작당은 이뤄졌던 것이다. 바다낚시대가 없는 날 위해, 한 녀석이 내 몫까지 낙시대를 들고 오리라 했다. 게다가 낚시를 하러 갈 목적지 또한 한 녀석이 여러번 가봤다며 정해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두 놈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엔 영문을 알수 없이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포기하고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두 녀석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졸지에 나는 낚시를 위한 도구도 낚시를 위한 목적지도 상실 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서생 이라고 했던가? 한 녀석이 낚시를 하러 가자고 말한 곳이. 1983년의 어느 날, 늦봄의 일요일 오전, 나는 220원 을 주고 서생으로 가는 기차표 한장을 샀다. 한 두어시간 뒤 기차는 교련복 차림의 나를 동해안의 조그만 시골 어촌 역에 내려놨다. 서생에 내려서 뭘 했던가? 별 다르게 한 건 없었다. 기차역에서 시골길을 따라 제법 걸었더니 바다가 있었다. 광안리나 해운대 같이 사람들이 들끓지 않는 바다. 그 바닷가를 걷다가, 드문 드문 앉아 낚시하는 이들을 구경하다가, 다 쓰러져가는 대포집에서 라면 한그릇을 먹고, 해가 지고 나서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늦봄이라 온갖 꽃과 나무들이 흐드러지게 올라오고 핀 그 길을 걷는 게 너무나 좋았다. 부산 시내의 바다와 다르게, 아무도 없는 바다가 좋았다. 무엇보다 그 절대고요 가 좋았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이렇게 다른 곳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 한 느낌이라도 들었다. 이 날은 내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 혼자 최초로 특정한 목적과 목적지 없이 사는 곳을 떠난 날" 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가 지고 난 뒤엔 다시 집으로 돌아온 데이트립 이긴 했지만. 이 날의 동래역은 델피의 아폴로신전 이었다. 여행을 평생의 화두로 받아 들이게끔 한 신탁을 받은 날이었다. 부산을 출발해 아름다운 바다와 어촌을 끼고 울산이나 경주 포항까지 가는 비둘기호 동해남부선 타기는 이십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노선이 동해남부선 이라고 믿는다. 기차를 타고,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수 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때 가장 빠져 있었던 소설가는 이청준 이었다. 그 알듯 모를듯 한 소설. 이어도 와 조율사 에 감동받은 나는, 또한 전혜린에 전염된 나는, 독문과만 나오면 다들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줄 알았다. 이청준은 서울대 독문과를 전혜린은 한국에서 법학을 마치고 독일 뮌헨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시책 '졸업정원제' 로 100 명이나 되는 지방대학의 독문학과 입학동기들중 이청준에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강의는 지루했고, 남자애들은 따분했고, 여자애들은 지겨웠다. 자연 학교를 가는 날보다는 안가는 날이 많았고, 동해남부선도 자주 타게되었다. 가방속에는 소주 한병과 창작과 비평 한권, 그리고 은하수 한갑을 잊지 않은 채. 혼자 탈 때도 있었고, 그 시절 시작해 그 시절에 끝난 짧은 첫사랑과 함께 일 때도 있었다. 그냥 가도 좋은 바다가, 알콜과 시가렛 그리고 책 까지 있으니 더 좋았다. 게다가 때로는 첫사랑 까지. 바닷가에 가서는? 방파제에 뒹굴거리며 그냥 가지고 온 책을 읽거나, 깡소주를 마시며 바다를 보고 담배를 피고 했을 뿐이다. EPILOGUE. 다시 배낭을 꾸리며 베란다 한 귀퉁이에 쳐 박혀 있던, 배낭을 꺼냈다. 내일이면 떠난다. 쿤밍으로 혼자. 쿤밍으로 들어가, 여강과 대리를 보고, 50 시간이 걸린다는 기차를 타고, 베트남 하노이로 넘어 간 뒤, 캄보디아에서 앙코르 와트를 보고, 라오스에서 메콩강 위의 보트에서 맥주를 마시며 놀다가, 태국으로 들어가 치앙마이에서 코끼리를 탄뒤, 미얀마로 넘어가서 운이 닿으면 남방불교에서 행하는 위빠사나 라는 명상을 좀 한 뒤, 다시 태국으로 들어와 남쪽 섬에서 놀다가 내년 3월 한국에 들어올 생각이다. 그러나 정해진 것은 없다. 단지 내일 쿤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3월 초에 방콕에서 나온다는 것 뿐. 내 여권엔 회사 일 때문에 받아 둔 내년 4월 까지 만기가 남아 있는 중국비자 와 인도비자 가 있다. 티벳이나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을 지나 신장으로 갈수도, 방콕에서 왕복을 끊어 남인도를 다시 돌수도 있다. 회사는? 물론 사표를 냈다. 작년 12월 1일에 입사해서 올해 12월 2일에 퇴사했으니 꼭 1년을 다닌 아니 버틴 셈이다. 1년간의 회사생활은 나 스스로가 회사형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반, 그리고 1년, 도합 4년으로 내 인생에서 회사 생활은 끝났다. 직업 혹은 일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육체적 인간을 먹고 살게 해주는 생계수단의 의미와 둘째는 어느 정도의 배고픔이 해결되고 나면 반드시 들게 마련인 자아정체성 의 의미다. 직업이 생계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정체성 까지 확립시켜 줄때 인간은 행복하다. 그 직업이 곧 나 일때 말이다. 그렇지 않을 때 사람들은 갈등을 하게 된다. 일 이란 결국 '하고 싶은 일' 과 '해야 하는 일' '잘 하는 일' 과 '못 하는 일' 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를 옮기더라도 한 업종에 오래 종사하는 반면, 나의 경우엔 졸업후 대형어학원에서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백수로 여행업계로 티씨로 그러다 이벤트 프로모션 업계에서 다시 백수로 그리고 도보여행자로 돌아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사회에 나온게 93년이니 그간 사회생활 11년의 기록이자 나 라는 인간의 변천사 이기도 하다. 회사를 관두면 생계는? 다시 투어리더를 할 생각이다. 다시 투어리더를 할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얘기가 이렇게 길어졌다. 무엇보다 투어리더 라는 직업 혹은 일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 할수 있는 일이다. 회사를 관둬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질 무렵 나는 안도했다. 만일 사회생활 11년 동안 한 업종에서만 일하다 관두고 나온다면 나는 도대체 뭘 할수 있었을까? 은행에 10년 근무 하다 퇴출되어 나온 사람의 그 불안감이 내게는 없다, 는 게 가장 큰 안도감이었다. 이쯤에는 회사를 관둔 이유가 궁금해 질만도 하다. 연봉과 직책이 괜찮은 회사였고, 그 쪽 분야의 일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새로운 분야에 쉽게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그 호기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이미 세상의 많은 일들을 너무 봐 버린 것이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스폰지 처럼 흡수하 는 20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사라지니 그 자리를 내면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채웠다.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일인가? 이 직업이 나의 정체성일까? 나는 이벤트 프로듀서나 이벤트 디렉터 라고 불려지길 원하는 걸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그렇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은 뭐냐? 라고 물어본다면,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나는 100개국을 여행할 것이고, 하루에 한권의 책을 읽고 한편의 영화를 보고 한장의 음반을 들을 것이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얘기에 대해 뭔가를 끄적여 보고 싶다는 것이다. EPIPHANY. 현현 긴 장문의 글을 줄이자면, 지금 내게 확실하게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일 여행을 떠난 다는 것. 돌아오면 다시 투어리더 일에 복귀한다는 것.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 지, 잘하는 지 못하는 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간절히 되고픈게,하고픈게 뭔지 알았다는 것. 그것뿐이다. 꽃피는 춘삼월에 뵙기를. POST SCRIPT. 여행기는 lastrada.egloos.com 에 연재 할 생각이다. 사용하고 있는 msn 메신저는 easyrider@hanmail.net |